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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ist of 59,964 killed by North Koreans in th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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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4-11 00:00:00  |  Hit 2034

A list of 59,964 killed by North Koreans in the Korean War discovered


6·25 때 좌익이 학살한 5만9964명 名簿 발견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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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묻은 명부 발견… 靈光 대학살 2만1225명 
金成東 月刊朝鮮 기자(ksdh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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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g 1 of 3 ▶ 

공보처 통계국이 작성한 피살자 명단 

 
6·25 납북자 8만여 명 名簿(명부) 발견(月刊朝鮮 2002년 2월호)에 이어 6·25 전쟁 당시의 참상을 보여 주는 피살자 명단이 발견됐다. 6·25 피살자 名簿는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이사장 李美一·이미일)가 납북자 名簿를 찾는 과정에서 함께 발견됐다. 

총 4권으로 이루어진 이 名簿에는 5만9964명의 피살자 명단이 실려 있다. 이번에 발견된 피살자 名簿는 국립중앙도서관, 정부기록보존소에도 동일한 문건이 소장돼 있으며 통계청도 피살자 名簿의 일부인 서울시와 경기도 지역의 피살자 명단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표지에 적힌 이 名簿의 정식 명칭은 「6·25 事變 被殺者 名簿」이며 작성 주체는 공보처 통계국으로 돼 있다. 작성일은 1952년 3월31일이다. 

名簿는 성명, 성별, 연령, 직업, 피해 연월일, 피해 장소, 본적, 주소 등 총 8개 항목으로 피살자들의 신원을 기록해 놓고 있다. 名簿는 피살자들을 크게 각 市道별로 구분한 다음 郡이나 區별로 세분화해 피해가 많은 姓氏 순으로 기록해 놓았다. 

凡例(범례)에 『6·25 사변 중 공무원 및 일반인이 잔인무도한 괴뢰도당에 피살당한 상황을 조사 편찬하였다』면서, 대상을 『軍警을 제외한 非전투자에 한하였다』고 밝혀, 인민군 등 좌익에 의해 피살된 사람들의 명단만 실려 있음을 알 수 있다. 


5만9964명의 피살자 가운데 전남 지역에서 피살된 사람이 4만3511명으로 전체의 72.6%를 차지하고 있다. 다음으로 전라북도(5603명), 충청남도(3680명), 경기도(2536명), 서울시(1383명), 강원도(1216명) 順이었다. 그 외 경상남도 689명, 충청북도 633명, 경상북도 628명, 제주도 23명, 철도경찰 62명이 좌익에 의해 피살된 것으로 기록됐다. 전체 피해자 가운데 남자가 4만4008명, 여자가 1만5956명이었다. 

여성 피살자 1만5956명 가운데 1만3946명이 전남 지역에서 피살됐다. 피살자가 집중된 전남 지역에서도 특히 靈光郡(영광군)의 피해가 가장 컸다. 전남 지역 피살자 4만3511명 중 절반에 가까운 2만1225명이 영광군에서 피살됐다. 영광지역 여성 피살자는 전국 여성 피살자의 절반 가까운 7914명이다. 

靈光郡 인근 지역의 피해도 컸다. 전북 지역 피살자 5603명 중 2364명이 피살된 고창은 행정구역은 전북에 속해 있지만 영광과 이웃해 있는 지역이다. 전남 지역에서도 영광과 이웃한 郡인 나주(3596명), 장성(4306명), 함평(1954명) 등에서 피살자가 많았고 영암 지역에서도 7175명이 피살됐다. 

大韓民國統計年鑑의 기록은 피살자가 12만2799명 
최근 발견된 6·25 사변 납북자 전국 명단의 예에 비추어 볼 때 이번에 발견된 6·25 피살자 5만9964명의 명단이 실린 名簿 외에도 인원이 추가된 새로운 名簿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1952년 10월에 발간된 「大韓民國統計年鑑(대한민국통계연감)」에는 납북자 수를 8만2959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月刊朝鮮이 2002년 2월호에서 「납북자 名簿 8만여 명 名簿 발견」 제하 기사를 보도한 후 확인 작업에 나선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는 8만2959명의 납북자 명단이 적힌 총 5권으로 이루어진 완전한 납북자 名簿를 찾아냈다. 月刊朝鮮 보도시에는 전국적으로 납북자 명단이 작성됐다는 정황 증거와 함께 서울특별시 납북자 1만8330명의 명단만 제시됐지만, 이를 토대로 확인 작업에 나선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에 의해 전국 납북자 명단이 실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같은 해에 작성된「大韓民國統計年鑑」은 피살자 수를 12만2799명으로 밝히고 있다. 통계연감과 납북자 名簿의 수치가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볼 때 12만2799명의 이름이 적혀 있는 피살자 名簿가 존재할 개연성이 높다. 정부기록보존소 측은 『우리가 소장하고 있는 것은 5만9964명의 명단이 적힌 피살자 名簿뿐』이라고 밝혔다. 

부친(李錫圭·이석규)이 전주형무소에서 인민군에 피살된 李哲承(이철승) 자유민주민족회의 대표상임의장은 『그동안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전주교도소 등에 문의해 알아보려고 했지만 서류가 남아 있지 않다는 이유로 알 수 없었다』면서 『이렇게 아버님에 대한 한 줄의 기록이라도 볼 수 있게 돼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李의장은 또 『요즘의 사회는 미군과 국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에 대해서는 공공연하게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학살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하는 이상한 분위기가 조성돼 있다』면서 『이번 문서 발견을 계기로 공산당에 의한 학살자들에 대한 보상 문제와 함께 공산당이 저지른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 노력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영광군 피살자 중 열 살 이하 어린이가 2500여 명 

때늦은 겨울비, 아니면 때이른 봄비가 내리던 날인 3월5일, 기자는 「죽음의 기록」을 등에 지고 영광으로 향했다. 6·25 당시 영광군의 피살자 2만1225명의 명단은 A4 용지 772장 분량이었다. 피살자 명단을 꺼내 훑어보았다. 명단을 입수했을 때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점이 보였다. 한 살, 두 살, 세 살… 아이들의 죽음이 다른 지역에 비해 유난히 많았다. 대략 수를 세어 보았다. 열 살 이하 어린이가 영광군 전체 피살자 2만1225명의 12%에 달하는 2500여 명이었다. 전국 여성 피살자의 절반 가까운 7914명이 이 지역 여성들이라는 사실과 아이들의 죽음. 그것은 일가족이 학살된 경우가 많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영광을 찾기 前 호남지역 향토사학자인 金井昊(김정호·65) 향토문화진흥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왜 유독 영광 지역의 민간인 피살자가 많은지를 물었다. 



『6·25 사변 당시 인민군이 후퇴할 때 미처 지리산으로 못 들어간 빨치산들이 영광 지역에 많이 모여서 빨치산 활동을 했습니다. 그 사람들에 의한 민간인 희생이 컸습니다. 특히 九岫山(구수산·해발351m) 주변 백수면과 염산면에서 민간인 피살자가 많았습니다. 영광 지역의 또 다른 특성은 해방 후 사회주의 색채를 가진 인사들이 많았던 곳이라는 점입니다. 좌우 갈등이 심했던 곳이라는 뜻입니다. 좌익이나 우익 진영 모두 그로 인한 희생도 컸을 겁니다』 

金원장의 설명은 기자가 품고 있던 또 하나의 의문, 즉 그렇게 엄청나게 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는데도 왜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은 해소해 주지 못했다. 영광 현지를 찾기 前 기초 취재를 위해 만났거나 전화로 통화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많이 죽었다』거나 『영암에서 제일 많이 죽었고 그 다음이 영광일 것』이라고 말할 뿐 그 수치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몇천 명은 되지 않을까』 하는 정도가 그들이 제시할 수 있는 그나마의 수치였다. 

영광 가는 길에 同行을 한 田玲先(전영선·61) 안양 대동서적 사장에게 영광에서 얼마나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田사장은 영광군 백수면 천정리 출신으로 만 아홉 살 때 6·25 전쟁을 겪었다. 6·25 때 큰아버지가 경찰에게 피살됐다. 


『엄청 많이 죽었어요. 한 수천 명은 될걸요』 

―2만 명이 넘던 데요. 



『그렇게 많습니까. 많이 죽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열여덟 살에 고향을 떠나 자수성가한 田사장은 독실한 원불교 신자로 4년 前부터 6·25 전쟁 때 영광에서 죽은 無主孤魂(무주고혼)을 위한 薦度齊(천도제:돌아가신 조상이나 부모님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齊儀式)를 올리고 있다. 無主孤魂들의 이름이라도 제단에 놓고 천도제를 올리면 좋을 것 같아서 6·25 때 자신의 고향인 백수면에서 죽은 사람들의 명단을 찾았지만 구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田사장은 기자에게 취재가 끝나고 나면 영광지역 피살자 名簿의 사본을 꼭 달라고 몇 번을 부탁했다. 

영광군 피살자 名簿를 보면 사망일시가 1950년 6월에서 1951년 2월까지 분포돼 있다. 영광에 인민군이 진입한 시기는 1950년 7월23일이다. 인민군이 진입하기 전에도 빨치산 등 토착 좌익에 의한 학살이 자행됐음을 알 수 있다. 빨치산이 완전 토벌된 때는 1951년 2월20일이다. 

1950년 6월에서 1951년 2월 사이의 전라남도 영광군.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는 가운데 기자가 가고 있는 곳은 2002년 3월의 영광군이 아니라 1950년 6월에서 1951년 2월 사이의 영광군이었다. 

야든이의 태극기 걸기 
영광군 영광읍에는 해발 257m 높이의 물무산이 있다. 이 물무산에는 1950년 6월에서 1951년 2월 사이의 영광군의 상황을 상징하는 하나의 죽음이 있다. 「야든이의 죽음」이 그것이다. 야든이는 그의 아버지가 여든 나이에 봤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물론 본명이 아닌 별명이다. 姓이 楊(양)씨인 것으로 전해질 뿐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8·15 광복을 전후한 시기에 영광군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영광 군수의 이름은 몰라도 야든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로 그는 이 지역의 명물이었다. 힘이 셌던 그는 품을 팔아 생활했다고 한다. 장터에서 짐을 나르고 초상집이나 잔칫집에서 심부름한 대가로 받은 돈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바보」로 불릴 정도로 일을 할 때는 요령을 피우는 일이 없었던 야든이는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했다. 대신 그는 공짜밥을 절대로 먹지 않았다. 

6·25 전쟁 때 인민군들이 물러간 후에도 영광군에는 빨치산들이 산악지역을 중심으로 잔존해 있었다. 잔존해 있는 빨치산 때문에 영광은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의 천하가 되는 상황이 他지역 수복 후에도 한동안 지속됐다. 영광읍에 있는 물무산도 마찬가지로 빨치산들이 숨어들어 영광읍내의 밤을 지배하고 있었다. 

문제는 물무산 정상에 있는 국기 게양대였다. 낮에 태극기를 걸어 놓으면 빨치산들이 밤 사이에 인공기로 바꿔 놓았다. 빨치산이 숨어 있는 물무산 頂上까지 가서 인공기를 내리고 태극기를 게양하는 일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돈을 주면 무슨 일이든 하는 야든이에게 아침마다 물무산 頂上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일이 맡겨졌다. 야든이는 태극기를 안고 물무산에 올랐다가 인공기를 들고 내려오는 일을 아침마다 반복했다. 

야든이에게는 공산주의도 민주주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일용할 양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야든이는 물무산 빨치산의 총탄을 맞고 숨을 거둔다. 남북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단지 생존을 위한 「밥」이 절실했던 야든이에게 죽음을 선물한 것이다. 

영광 출신인 정종(86·철학박사) 前 원광大 교수는 『야든이가 살아 있을 때 이웃들에게 그에 관한 이야기는 늘 유쾌했을 정도로 그는 선량한 국민이었다』면서 『야든이의 죽음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보여 주는 상징』이라고 말했다. 


시댁 식구의 목숨과 친정 아버지의 목숨을 선택해야 했던 여인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은 극단의 선택을 강요한다. 6·25 전쟁 당시 영광군 백수면 천정리에 살던 한금례(88)씨의 증언은 같은 마을에 살던 한 여인의, 친정 아버지의 목숨과 시댁 식구의 목숨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가슴 아픈 선택」에 관한 이야기다. 

천정리에는 이웃 대전리에서 시집을 온 한 여인이 있었다. 한금례씨는 여인의 남편이 한모씨라는 것은 기억하지만 여인의 성과 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 여인의 친정은 경찰 가족이었다. 빨치산들에게 軍警(군경) 가족은 학살 대상 1호다. 빨치산들은 여인의 친정 식구들을 모조리 죽였다. 마침 외출했던 여인의 친정 아버지는 학살을 모면하고 딸이 있는 천정리로 도망을 쳤다. 여인은 친정 아버지를 같은 마을 김근호씨 집에 숨겨 주었다. 

여인이 친정 아버지를 숨겨 주었다는 사실은 첩보원 역할을 하는 마을 사람들에 의해 빨치산들에게 알려졌다. 빨치산들은 여인에게 친정 아버지를 내놓지 않으면 그녀의 시댁 식구들을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다. 결국 여인은 친정 아버지를 김근호씨 집에 숨겨 주었다는 자백을 하고 말았다. 

빨치산들이 김근호씨 집에 들이닥쳤을 때는 여인의 친정 아버지가 이미 몸을 피한 후였다. 빨치산들은 당장 친정 아버지를 찾아내지 않으면 여인의 시댁 식구들 뿐만 아니라 숨겨준 집 식구들까지 죽이겠다고 위협을 했다. 그때까지 빨치산들의 행태를 보아온 여인은 빨치산들의 위협이 단순한 위협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어느 쪽의 죽음이든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채 해산기도 가시지 않았던 여인의 선택은 친정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여인은 갓난아이를 등에 업고 친정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찾을 수가 없었다. 아마 안도보다는 아득한 절망을 느꼈을 것이다. 여인의 앞에 놓인 것은 자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갓난아이를 비롯한 가족과 이웃의 떼죽음이었다. 

여인의 가족들이 체념 상태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 「悲報(비보)」라고도 「朗報(낭보)」라고도 할 수 없는 소식이 들려왔다. 대전리로 돌아가 숨어 있던 아버지가 결국 빨치산에 붙잡혀 처형당했다는 소식이었다. 친정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여인의 시댁에 짙게 드리웠던 죽음의 그림자는 사라졌다. 

불행 중 다행이란 말을 이런 상황을 묘사하는 말로 쓰기에는 여인에게 부닥친 상황이 너무 잔인하다. 여인에게 닥친 당시의 현실은 불행 중 불행이라는 말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갓봉과 수리봉 
한금례씨의 또 다른 증언은 경찰에 의한 사살이다. 


백수면 구수산에는 갓봉(344m)과 수리봉(351m)이 있다. 갓봉은 빨치산 본부가 있던 곳이고, 수리봉은 대한민국 軍警이 빨치산 토벌 전진기지로 사용하던 곳이다. 갓봉과 수리봉은 직선거리로 2㎞ 떨어져 있다. 두 봉우리 사이에는 입석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彼我(피아) 간에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곳이다. 한씨의 고향 천정리는 입석골 골짜기에서 3㎞쯤 내려오는 곳에 위치해 있다. 경찰이 갓봉에 있는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서는 천정리를 지나야 했다. 

1950년 11월경에 벌어진 일이다. 빨치산 토벌 작전에 나섰던 경찰병력이 천정리에 들어왔다. 경찰은 갓봉에 있는 빨치산 토벌에 애를 먹고 있었다. 산의 높이는 낮지만 깎아지른 듯한 절벽 등으로 둘러싸인 갓봉을 정복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날도 경찰은 빨치산 토벌에 나섰다. 

한씨는 빨치산과 전투를 하기 전이었는지 후였는지를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천정리에 들어온 경찰이 빨치산과 내통한 사람들에 대한 색출작업을 벌인 것만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경찰들이 그날 빨치산과 내통했다며 어린아이 두 명을 포함해 일곱 명의 천정리 사람들을 총살시키는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한씨가 지금도 안타까워하는 것은 갓난아이의 죽음이다. 빨치산인 남편을 대신해서 끌려나온 한 여인의 등에는 아기가 업혀 있었다. 경찰은 여인을 향해서 총을 발사했고, 여인을 관통한 총알은 등에 업혀 있던 아이까지 관통했다.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에구… 쯧쯧』 

말을 마친 한씨는 52년 전 벌어졌던 그 사건이 바로 당장 목전에서 벌어진 일인양 안타까워하며 혀를 찼다. 한참 혀를 차던 한씨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래도 공산당이 더 나쁜 짓을 많이 했어. 잘못 걸리면 온 가족을 전부 죽였으니까. 운이 있으면 살고 운 없으면 죽고, 그 사람들 기분 내키는 대로 죽이고 살리고 했어』 

현재 백수면 길용리에 사는 전계선(62)씨도 경찰에게 아버지를 잃었다. 「밤손님」(영광 사람들은 빨치산을 밤손님이라고 불렀다)에게 밥을 주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당시 전씨의 나이는 만 10세였다. 당시에도 그는 백수면에 살았다. 경찰에게 아버지를 잃었음에도 전씨는 좌익에 대한 적개심이 더 강해 보였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한 죽음에 대한 목격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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