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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납북자 송환에 인생을 건 3人
이름: 관리자
2011-11-15 16:58:14  |  조회: 37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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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의 젊은 시절 사진을 들고 있는 이미일 이사장. photo 김승완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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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심 속에 방치되었던 납북자 10만명. 납북자 송환 문제가 지금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지난 10월 말 박선영 의원(자유선진당)은 국회 본회의에서 국무총리와 국무위원들에게 ‘물망초 배지’를 나눠줘 잊혀져 가는 납북자의 존재를 상기시켰다. ‘물망초 배지’는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이사장 이미일)가 납북자를 잊지 말자는 의미를 담아 지난해부터 제작·배포해 왔다. 주간조선 2178호(10월 24~30일)는 북한 당국이 작성한 평양시민 210만명 신상자료 분석을 통해 납북자 21명이 평양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보도 이후 납북자 가족들은 매일 주간조선에 전화를 걸어와 부모형제의 생사를 확인하고 있다. 주간조선이 지난 6월 점화시킨 ‘통영의 딸 신숙자 모녀 구출 서명운동’도 10만명을 돌파해, 전국화되었다.

납북자 10만명은 크게 다섯 그룹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6·25전쟁 포로 △6·25전쟁 납북인사 △납북어부 △1969년 KAL기 납치피해자 △고교생·일반인들이다. 6·25전쟁 이후 북한의 납치만행은 해상·육상·공중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행됐다. 해상 납치는 모두 130회가 넘는다. 지난해 3월 국회는 의미있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6·25전쟁납북피해자 보상법’. 이 법안은 이미일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회장이 7년간의 노력 끝에 통과됐다. 이 법률의 국회 통과를 위해 앞장선 사람은 김무성 의원(한나라당)과 박선영 의원이었다. 이 법률에 근거해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6·25전쟁 납북피해자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위원회’가 설치되었다.

“DJ정부, 납북자 300~400명으로 발표… 충격받고 단체 결성”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사무실은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317 성일빌딩 2층에 자리잡고 있다. 서울 지하철 1호선 청량리역 2번 출구로 나와 홍릉 방향으로 걸어서 5분여 걸린다. 성일빌딩은 대지 1983㎡(600평) 위에 지어진 5층 건물. 이미일 이사장이 두 살 때인 1950년 이곳에는 놋그릇공장이 있었다. 그의 부친 이성환씨의 비극은 그해 9월 이곳에서 발생했다.

이성환씨가 1920년 태를 묻은 곳은 평북 박천군 원산면 용개동 96번지. 부농이었던 그의 부친은 아들을 경성(현 서울)으로 유학을 보냈다. 그는 휘문고보를 나와 일본 유학을 갔다. 와세다대학에서 법철학을 공부하던 중 태평양전쟁이 터졌다. 일본 내부가 혼란스러워지자 그는 아버지의 뜻대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한다. 일제강점기에 그는 경성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1944년 그는 소아과의사 김복남과 결혼했다. 김복남씨는 1922년 개성에서 태어나 개성호수돈여고를 거쳐 경성여의전을 졸업하고 도립병원에서 소아과의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김복남씨는 결혼과 함께 의사 일을 그만두고 살림만 했다. 광복 이후 이씨는 미군정 시절 한동안 통역관으로 일했다.

이성환씨는 미군정청을 나온 후 서울 청량리동 317번지 일대의 땅 1983㎡를 사들여 이곳에 놋그릇공장을 세웠다. 당시 공장 뒤편으로는 전부 논밭이었다. 놋그릇공장은 할아버지가 평북 원산에서 해온 가업이었기에 나름의 노하우가 있었다. 청량리 놋그릇공장에서는 놋대야와 징을 전문적으로 생산했다. 직원도 13명으로 불었다. 살림집은 공장과 바로 붙어 있었다. 1950년이 되었을 때 부부의 슬하에는 은일·미일·영일 세 딸이 있었다.

1950년 6·25전쟁이 터졌을 때 이성환·김복남 부부는 피란을 가지 못했다. 9월 4일 공장 살림집에 유소좌라는 남자가 들이닥쳤다. 유소좌는 작은 키에 강한 함경도 억양을 쓰고 있었다. 유소좌가 이성환씨를 찾았다. 부인은 며칠 전 시아주버니(의학박사 이성봉)가 납치된 기억이 있기에 남편 대신 나서려고 했지만 이성환이 “괜찮다”며 유소좌와 대면했다. 두 사람이 나눈 대화의 일부.

“서북청년단에 기부를 많이 했느냐.”

“이북에서 내려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해서 조금 했다.”

“조금은 왜 했느냐.”

“….”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했지만 재정 상태는 형편 없었다. 당시 공장을 운영하던 이성환씨는 건국 과정에 약소한 금액을 기부했다.

유소좌는 물어볼 게 있다며 이성환씨를 끌고 갔다. 이것이 스물여덟 살 부인과의 생이별이 되었다. 세 딸은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아버지와 이렇게 헤어졌다. 둘째딸 미일은 그때 두 살이었다. 남편이 납치된 이후 아내는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자 아내는 남편 시체라도 찾겠다며 서울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남편 시체를 확인하면 그 자리에서 딸 셋과 함께 죽어버리고 말겠다는 심사였다. 서울 어디에도 남편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겨울이 찾아왔고 1·4후퇴와 함께 국군은 다시 서울을 내줘야 했다. 김복남은 이번에는 어린 세 딸을 데리고 1·4후퇴 피란 행렬에 뛰어들었다. 이렇게 부산 피란 생활을 시작했다.

김복남은 휴전과 함께 다시 청량리동 집으로 왔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남편을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 김복남은 다시 의대에 편입해 전문의 자격증을 딴 뒤 성일산부인과를 개업했다. 첫 번째 개업 장소는 납치된 시아주버니의 병원이 있던 서울 종로구 계동. 1963년 김복남은 병원을 놋그릇공장이 있던 청량리로 옮겼다. 그리고 끝까지 병원을 옮기지 않았다. 미일씨의 이야기다.

“어머니가 여길 못 떠나셨어요. 혹시나 아버지가 돌아오셨을 때 집이 없으면 우리를 찾지 못한다구요. 지금 살아계시면 91세인데, 생존에 대한 기대는 어렵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우리가 확인한 게 없잖아요. 현재로선 깜깜절벽이니까요. 돌아가셨다는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아요. 아버지는 어머니 평생의 유일한 사랑이었어요. 아버지는 몹시 가정적인 분이어서 6년간의 짧은 결혼생활에서 한번도 다퉈본 일이 없으셨답니다. 어머니는 평생 아버지만을 기다리셨어요.”

이성환씨의 납치는 아내에게 마르지 않는 눈물이 되었고, 세 딸에게는 평생의 한(恨)으로 남았다. “아버지가 사신 땅을 어머니는 끝까지 관리하셨어요. 중간에 토지사기단에 걸려 10년 동안 민사소송을 하느라 고생하셨지만 결국 지켜내셨어요.”

이미일씨는 서울사대부고와 이화여대 의류직물학과를 졸업했다. 두 살 때 결핵성척추염을 앓아 몸이 불편한 그는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 어린이집을 한동안 운영했다. 기억에 없는 아버지의 상실을 한으로 품고 살아온 딸이 납북자 송환운동을 하게 된 것은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 9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납북자가 300~400명”이라고 한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전후 납북자 수만 합산하면 그 수가 비슷할지 모르죠. 분명한 사실은 전쟁 납북자가 훨씬 많았는데 대통령은 그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담당기자에게도 정정요구를 해봤지만 혼자 힘으론 한계가 있다 싶어 단체를 결성하기로 한 겁니다.”

2000년 11월 30일 이미일씨는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를 결성해 100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관계 당국에선 무성의한 답변만 돌아왔다. 결국 이미일씨는 불편한 몸으로 전국의 도서관과 고서점을 돌아다니며 납북자 명단을 확보하려 애썼다. 언론의 도움으로 이미일씨는 1952년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작성한 8만2959명의 ‘6·25사변 피랍치자 명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수차례 통일부를 방문해 진상규명을 요구했지만 담당자는 명부를 믿지 못하겠다면서 실태조사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실태조사를 하려면 행정자치부의 협조가 필요한데 법이 없어서 어렵다는 겁니다. 그래서 국회의원을 상대로 입법 운동을 하기 시작했지요.”

2003년 10월 송영진 의원에 의해 ‘6·25전쟁 납북자 명예회복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을 발의했고 2010년 3월 마침내 국회를 통과했다. “어머니는 내가 몸이 불편하니까 장애인이 살기 편한 미국에서 살기를 원하셨지만 아버지가 사랑했던 대한민국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한국 언론이 납북자 문제에 무관심한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납치는 반인륜 범죄입니다. 인권은 어떤 이념보다도 우위에 선 개념인데 납북자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습니다.”/조성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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