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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kmin] Keeper of hope - Lee Mi-il "Carry a foreget-me-not for war abducte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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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9 15:01:30  |  Hit 893
[국민] 이 땅의 희망지기-이미일 “전시 납북자를 위해 가슴에 ‘물망초’ 달아주세       2013-05-27              




[이 땅의 희망지기-이미일] “전시 납북자를 위해 가슴에 ‘물망초’ 달아주세요”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미일 이사장

“6·25 납북자 문제는 저 이외엔 아무도 안 건드리는 일이에요. 관심도 없고요. 하지만 전 이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대한민국 현대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자 역사의 주요 줄거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미일(64·여)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은 두 살 때 헤어진 아버지를 63년째 찾고 있다. 살아있다면 올해로 93세인 이 이사장의 아버지는 1950년 9월 서울 청량리동 자택에 찾아온 한 남성을 따라나섰다 납북됐다. 당시 28세이던 그의 어머니는 전쟁 중 사라진 남편의 소식을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하지만 1년 만에 가족들이 확인한 사실은 자강도 포로수용소로 가는 아버지를 본 이가 있다는 것뿐이었다.

어린시절 아버지와 생이별한 이 이사장은 이 일 이후 ‘고난의 가시밭길’과 같은 삶을 살았다. 두 살 때 유모의 부주의로 현관에 떨어지면서 척추장애를 얻었고 장애인을 받아주는 학교를 찾기 어려워 뒤늦게 국민학교 5학년에 편입하면서 처음으로 학교 문턱을 밟았다. 노력으로 장애와 연좌제를 극복해 명문대에 입학했고, 이후 결혼도 했지만 이조차 순탄치 않았다.

16년간의 결혼생활을 접은 뒤 18년간 어린이집 원장으로 지내던 이 이사장이 장기 미해결 현안인 6·25전쟁 납북자 문제에 뛰어든 것은 일종의 사명감 때문이다. 지난 21일 서울 청량리동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전시(戰時)납북자 문제를 국내외로 알리는 일을 삶의 목적이라고 표현했다.

“국민은 물론이고 정부조차 망각한 존재를 현실로 끄집어낸다는 게 보통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전 제 인생뿐 아니라 이 일도 하나님께서 인도한 것이라고 믿어요. 삶 속의 기구한 경험도 이 일에 더 매진하라는 그분의 뜻이 있었겠지요. 만약 이러한 여건이 아니었다면 저를 비롯해 이런 일에 인생을 올인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 않았겠어요?”

하나님께 이유를 묻다

이 이사장은 자신을 ‘꼽추’라 놀리는 동네아이들의 놀림이 너무도 듣기 싫었다. 골방에서 누워 있기가 답답했던 여섯 살 무렵의 그는 또래들과 어울리고 싶을 때마다 어머니 몰래 집을 나서곤 했다. 그러나 밖에 나가면 수군거리는 주위의 곱지 않은 시선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안고 집으로 들어왔다.

‘하나님 전 정말로 살기 싫어요. 몸도 불편하고 목소리도 잘 안 나오는 절 왜 지금껏 살려두시나요!’

그는 서러움이 사무칠 때마다 집안 골방에 들어가서 한참을 울며 하나님께 기도했다. 몸이 불편해 매주 교회를 갈 순 없었지만 신앙생활을 하던 어머니에게 이끌려 유아세례를 받았고 종종 기도원에 동행했던 터라 절대자의 존재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다친 척추에 결핵균이 감염돼 골결핵이 왔다는 병원 진단이 나오자 어머니는 그가 일곱 살 때 척추 수술을 시켰다. 또 진통을 줄이기 위해 파스를 붙여주고 주사를 맞혔다. 병원 치료로 차도가 없자 불치병을 고친다는 목사를 찾아다니며 기도를 받게 하기도 했다.

헌신적인 어머니의 보살핌이 감사했지만 때때로 아버지 없이 평생 불구의 몸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감정이 북받쳤다. 이러한 심적 고통은 그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계속됐다.

“의사인 어머니는 시부모님과 세 딸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에 저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어요. 그래서 너무 속상할 때마다 ‘힘들다, 죽겠다’고 하나님께 울며 생떼를 썼지요. 그런데 어느 날 ‘내가 널 살린 목적이 있다. 네 인생은 내가 인도할 테니 살아있기만 해라’는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는 게 아니겠어요. 이런 경험을 세 번 겪은 뒤론 더 이상 하나님께 따지지 않았어요. 하나님께서 제 존재에 대한 뜻이 있다는 걸 확신했기 때문이죠.”

공부를 잘했던 이 이사장은 67년 이화여대 의류직물학과에 입학했다. 인연도 만났다. 서울대 미대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한 청년을 만나 사랑에 빠진 그는 71년 결혼했다. 이 이사장의 남편은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었다.

대학교수로 임용된 남편을 따라 학교가 있는 전주로 이사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이 이사장은 어느 날 남편의 곁에 모르는 여인이 있는 걸 목격했다. 남편의 외도로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신경쇠약에 걸렸다. 배신감 때문에 잠도 못자고 밥도 먹을 수 없었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성경을 펼쳐 들었지만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인근 교회에서 부흥회를 한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참석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릴 때 들었던 하나님의 음성을 마음속으로 다시 한 번 들었다.

“처음으로 간 부흥회에서 저도 모르게 회개가 나오더라고요. 회개기도를 하는데 하나님께서 제게 ‘너도 죄인이다’란 말씀을 하셨어요. 남편의 배신으로 만사가 힘들었던 제게 ‘내가 죄인’이란 말은 충격적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듣자마자 마음에 평안이 왔어요. 저도 죄인이니 누구 더러 잘못됐다 말할 자격이 안 된다는 걸 알게 됐거든요. 이 일 이후 성경을 공부하면서 저를 둘러싼 모든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는 경험을 했어요. 남편도 용서가 됐고요. 저 사람 잘못보다 내가 부족한 탓이려니 하고요. 그래서 남편이 이혼을 요구할 때도 순순히 응했던 것 같아요. 나쁘게 헤어지진 않았습니다. 이후에도 간간이 소식을 교환하면서 ‘그저 신앙만은 잃지 말라’는 당부를 하곤 했지요.”

잊혀진 그 이름, 전시납북자

남편과 이혼한 87년 그해 서울로 돌아온 이 이사장은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고 88년 소망어린이집을 개원했다. 장애인 시설을 열까도 생각했지만 어린이집을 택했다. 슬하에 자녀는 없었지만 어린이들과 함께할 때 가장 행복해서였다.

어린 영혼들에게 믿음의 씨앗을 심겠다는 각오로 어린이집을 시작한 그는 신앙인을 교사로 채용했다. 어린이집은 2006년까지 18년간 했다. 2001년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를 세운 이후론 할 일이 점차 늘어 동시에 두 가지 역할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 이사장이 좋아하는 일을 그만두고 전시납북자 문제에 매달리게 된 것은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기자회견에서 밝혀진 납북자 통계 때문이다. 그는 납북자가 485명이라는 정부의 발표를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50년대에 어머니가 ‘6·25사변 피납치 인사 가족회’로 활동해 어느 정도 납북자 숫자를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60년대엔 정치적 상황에 따라 수많은 납북자 가족들을 자진월북자 가족으로 낙인찍으며 연좌제로 불이익을 줬는데도 납북자 수를 고작 500여명으로 발표한 정부가 원망스러웠습니다. 전후 납북자만 계수한 거라면 몰라도 전시납북자까지 합쳤는데 그 정도라니요. 언젠간 나라가 기억하고 챙겨주려니 했지만 아예 논의조차 안 되더군요. 피해자 가족들도 모두 입을 다물었고요. 그래서 이대로 묵과할 순 없다는 생각에 몸은 부실하지만 제가 나서게 된 겁니다.”

그는 2001년부터 자비를 털어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를 결성했다. 전시납북자 관련 자료를 수월하게 수집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공개하기 위해선 단체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언론사와 관련 부처에 납북자 통계가 잘못됐다고 알려도 묵묵부답이더군요. 근거가 없다는 거예요. 당시 언론인, 목회자 등이 그렇게 많이 끌려갔다고, 내가 피해자 가족이라 말해도 소용없었어요. 당시 정부 부처 관계자는 납북자 명부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어요. 그러던 중 고서 장서가였던 지인에게서 전쟁 시 납북과 관련해 서울시 피해자 명부를 본 적 있다는 말을 들었죠. 결국 수소문 끝에 그 명부를 손에 얻었지요. 통계청 공보국이 작성한 그 명부엔 납치, 행방불명, 피살자 명단이 들어 있었는데 유명인사 중심이었어요.”

이 이사장은 이를 한 언론사에 알렸다. 제보를 받은 기자는 취재 도중 통계청에 전시에 납북된 사람들의 명부가 있으며 이는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마이크로필름으로 보존돼 있다는 걸 발견했다.

“명부가 존재한다는 보도가 나오자 한 납북자 가족이 아버지 명단을 확인키 위해 국립중앙도서관에 찾아가 얻은 자료 복사본을 가족회로 가져왔어요. 이를 보니 총 5권의 전국 명부가 있는 게 아니겠어요. 서울시 명부만 있는 게 아니었던 거죠. 그 길로 저도 ‘6·25사변 피납치자 명부’ 자료 5부를 복사해 왔지요. 이렇게 해서 52년 당시 파악된 6·25전쟁 납북자가 8만2959명이란 사실을 밝혀낸 겁니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작성한 문서에서 말이지요. 마치 기적 같았어요. 명부를 찾는 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도움을 받으면서 ‘이 일은 내 힘이 아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인도하셨구나’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아픈 역사, 잊지 말아요

이 일을 계기로 자료의 중요성을 다시금 알게 된 이 이사장은 명부 발굴과 데이터베이스화 작업에 집중했다. 52년 이후 납북자 명단 문건을 꾸준히 확보한 그는 2006년 제1차 한국전쟁납북사건사료집을 낸 데 이어 2009년 제2권을 발간했고 관련 토론회도 여러 번 개최했다.

이 이사장의 이 같은 노력의 결실은 ‘6·25전쟁 납북피해 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이 2010년 3월 국회를 통과하면서 이뤄졌다. 법 제정을 준비한 지 7년 만의 일이었다.

“특별법이 통과됐을 때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릅니다. 2003년부터 2번 실패하고 3번째 발의해 성공한 것이라 더 각별했어요. 전시납북자 문제를 알리려고 자료 수집도 했지만 정치적 행사에도 꽤 동원됐거든요. 행사 뒤쪽에서 눈물도 많이 흘렸어요. ‘이렇게 하는데, 우리도 전후납북자처럼 널리 알려져야 할 텐데…’ 하고요. 아무 도움도 못 받다가 법에 따라 국무총리 소속으로 위원회가 설치돼 납북사건 진상조사와 납북자 명예회복 등 관련 활동이 시작된다니, 그저 감격할 뿐이었죠.”

이후로도 그의 ‘전시납북자 알리기’ 행보는 계속됐다. 납북자 가족과 함께 2001년부터 ‘납북 길 따라 걷기’ 행사를 열었고 2011년부턴 납북자나 국군포로 등 북한에 억류된 10만여명을 기억하기 위한 ‘물망초 배지 달기 범국민대회’를 진행했다. ‘나를 잊지 말아요’란 꽃말을 가진 물망초 배지를 배포해 국민들이 이들을 기억하고 송환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 달라는 취지에서다.

하지만 이 이사장은 국내에 문제를 알리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단순히 국가가 전시납북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데 그쳐선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고 했다. 북한이 전쟁 중 민간인을 납치했던 사실을 인정하고 납북자 송환과 유해 인도를 위해 조치를 취하도록 국제사회가 나설 것을 호소해야 한다고 했다. 이 때문에 이 이사장은 2011년 납북자 문제 해결을 위한 결의안을 미국 의회에 통과시키기 위해 직접 미 의원을 찾아다니는 등 발품을 팔았다.

“잘나지 않은 제가 전시납북자를 알리기 위해 계속 소리를 내는 건 아직도 이 일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지식인이자 사회주의 건설에 걸림돌이 된다고 여겨지던 기독교인이 적지 않게 희생됐음에도 교계조차 관심이 거의 없어요. 목자가 교회를 어떻게 떠나느냐며 피란을 안 떠나 잡혀가신 분들인데도. 납북자 문제는 이념도, 인권문제도 아닙니다. 포로에 대한 제네바 협약을 위반하고 민간인에게 가혹행위가 가해진 범죄행위죠. 이 아픈 역사를 더 많은 이들에게 알려 분단의 아픔으로 고통 받는 이들이 위로받기를, 다시 가족의 소식을 접하는 통일의 그날이 하루라도 당겨지길 기도합니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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