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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orean War and its mis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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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9-27 00:00:00  |  Hit 2192

The Korean War and its misery

+ 6.25전쟁, 그 참상 
 
이름 : 운영자     번호 : 158 
게시일 : 2001/06/10 (일) PM 04:30:42  (수정 2001/06/13 (수) AM 02:57:11)    조회 : 817  

        + 6.25전쟁, 그 참상 
                      
                    1.  남침      
치열했던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국군사망, 부상으로 인한 병력손실은 52만, 

중공군의 병력손실은 90만으로 각각 추산되었다. 일반주민의 피해는 남한의 
                                                     
경우 사망 24만 5000명이었고 실종 30만, 부상 23만, 학살 13만, 납치 8만 5

천명이었고 이밖에 30만에 가까운 전쟁미망인, 33만의 전쟁불구자, 10만의 고아, 100만의 결핵환자가 발생했다.
(1950년 6월 25일~1953년 7월 27일)- 자료: 내무부 발행 「대한민국 통계연감, 1953년도 제2회」

민족과 국토에 前代未聞의 대재난을 가져다준 이 남침전쟁에 대해 북한당국은 6.25동란은 그들의 남침이 아니라 북침이라는 賊反荷杖의 허위주장을 되풀이하여 선전해 왔고 역사적 죄과를 모면하려고 급급해왔다.   

       2.   붉은 만행   
북한 공산군이 개전초기에 「유우엔」군의 낙동강 방어선 이북의 남한 일대를 점령하고 있는 동안 점령지역의 주민들에게 가한 살인,공포,학대의 정책은 전지역을 생지옥으로 변모시켰다.
공산군은 서울을 점령한 후 점령지의 모든 주민이 「인민군」에 협력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人的 物的 자원의 전력화 방침을 밝히고 이를 집행하는 기구로 각 점령지역에 이른 바 「  인민 위원회」를 조직했다. 이와 병행하여 당기구와 사회단체를 조직하는 한편 남로당 출신분자로 사전에 육성 조직해 둔 점령지역 군정요원을 파견하여 행정기구를 장악하고 현지에 잠복하고 있던 공산당원이나 친공분자 또는 감옥에 있다가 출옥한 범법자들을 목적에 이바지하도록 했다.
1)이들이 이 점령지역에서 맨처음 실시한 것은 반동분자 색출이었다. 
    -대한민국 군경
    -우익단체와 각 사회단체 요원    
    -공무원 등
 이런 인사들에 대한 검거, 투옥, 납치, 학살은 극히 교활하고 잔인한 수법으로 진행되었다.
  
 2)요인체포와 숙청은 이런 사람들이 하였다.
    -정치보위부
    -내무서(경찰)
    -북한이 急造한 각 사회단체
 
서울의 경우 공산군은 6월 30일  「정치범들은 자수하라」는 포고문을 발표한 뒤 과거 우익계의 내막을 소상히 아는 사람들을 회유, 위협하여 가두 특수정보망을 조직하고 이들을 앞장세워 요인들의 가택수색까지 해가면서 체포하였다. 체포에 실패하면 이미 체포된 거물급 요인을 시켜 신문 또는 방송을 통해 자수를 권유토록 했다.


3). 무서운「인민재판」이 정규적으로 장기간에 걸쳐 계속되었다.
체포된 사람들은 일단 해당 내무서에 넘겨저 심사를 받고 유치장 또는 중앙청 지하실 등에 수감되었다. 지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른바 「인민재판」이라는 공개처형방법으로 공포분의기를 조성하여 시책의 능률화를 꾀했다. 서울에서는 동숭동의 전 서울문리대교정, 서대문 송월동, 명동국립극장 앞, 돈화문 앞, 명륜동 입구, 전 국회 의사당 앞에서  「인민재판」이 열렸다. 한 목격자의 증언이 있다.

-어느날 아침 동숭동 동민들은 전부 문리대 운동장으로 모이라는 엄명이 내려 영문도 모르고 나갔더니 권총, 장총, 따발총을 든 공산당원들이 몇 사람의 젊은이들을 포박해 놓고「자, 지금부터 인민재판이 시작된다.」고 외쳤다. 완장을 찬 자가 큰 소리로 여기에 잡아다 놓은 이 자는 어떤 어떤 행위를 한 사실이 있는 악질분자이므로 총살을 해야겠는데 반대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말했다. 그것이 부당하며 불쌍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진정이었지만 아무도 반대의견을 말할 수 없었다. 당장 자기 목이 달아날 판이었다. 모두 쥐죽은 듯이 있자 그 자는 「그러면 여러분은 전적으로 찬성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총살형을 집행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포박당한 젊은이들을 뒤로 돌려 앉혀놓고 총을 쏘았다.(兪鎭午외 3인공저 「고난의 90일」)-
                                 ------   
체험한 실례로 문단의 저명한 인사 金八峰씨가 전 국회의사당 앞에서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몽둥이로 머리를 맞고 死境을 헤매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이야기가 있다.  반공인사 처형은 지방으로 갈수록 더욱 극심했다. 인민재판으로 인한 희생자수는 헤일 수 없이 많을 것으로 본다.   

 4) 투옥된 인사들의 끔찍한 학살은 단기간에 대량으로 실시되었다.
                           
전세가 불리해진 북한당국은 1950년 9월 20일 수감인사들에 대한 조치를 전 점령지역의 행정기구에 하달했다. 그들은 수감자들을 형무소에서 또는 산중으로 끌고 가서 대부분 집단학살해 버렸다.      충남의 경우 인민군 후퇴직후 형무소 안의 두 개 우물에는 시체가 가득 차 있었으며 그중 한 개의 우물에는 300여구의 시체가 생매장되어 있었다. 총알이 아까왔던지 어린아이까지도 돌로 찍어 죽인 후 구덩이를 파서 아무렇게나 묻어놓은 참상이 도처에서 목격되었다. 전남북 지방의 학살이 제일 많았다. 전주에서 그들이 후퇴할 무렵인 1950년 9월 26일 경 전주 형무소에서 수백명, 9월 20일 경 1주일동안 광주형무소에서는 300명이 떼죽음 당했다. 전남 임자도에서는 전체주민의 반수 이상이 공산당에게 처형당했다.

 5)점령기간 중에 북한으로 납치되어간 인사들도 수없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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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정 3개월동안 공산주의자들은 엄청난 수단, 방법으로 반공인사와 민족주의자들을 체포했다. 체포된 인사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북으로 강송되었는데 
 
제1차는 1950년 7월 하순경 평양현황을 구경시킨다는 구실로 끌고 갔다. 이때는 주로 정계요인들로서 남북협상파, 자수자, 국회「프락치」 사건  관련자등 북한측이 이용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사람들이었다.
 
제2차 납북은 8월 중순경에 있었는데 여기서는 반동분자, 반동관료로 낙인찍혀 각 내무서유치장과 중앙청 지하실에 감금되어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도보로 끌려가다가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해 낙오하는 사람은 도중에서 총살되고 말았다. 이뒤에도 공산주의자들은 서울을 후퇴하면서 양민들을 떼지어 몰고 갔다.

막바지에 이르러 공산군은 서울시내에 이른바 「전출」이라는 이름으로 강압과 선동을 하여 서울 시민의 월북을 획책했다. 1950년 7월부터 8월초 사이였다. 이는 서울시의 인구를 절반가량 줄이기 위한 정책으로 북한행정기구는 각 동마다 전출인원 수를 배정하고  강제철거를 단행했다. 북으로 가면 편안히 살 수 있다고 선전을 하는등 강압과 회유의 양면공작을 진행하여 무더기로 끌고 후퇴했다.  

 6)의용군 강제모집이 있었다. 1950년 7월 1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원회 政令」으로 전시동원령을 공포하고 점령지역에서도 똑같이 실시했다.

1)전지역에 걸쳐 동원 선포
2)동원대상은 1914년부터 1932년 사이
3)7월 1일부터 동원령 발표를 골자로 하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의용군」모집을 위한 대대적인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서울은 7월 3일 오전 11시 서울운동장 앞과 금화국민학교(서대문구 천연동)에 시내 85개 학교의 학생 약 1만6천명을 모이게 하고 「전선을 지원하자」는 구호를 외치게 하면서 시가행진을 시켰다. 오후 2시에는 동대문과 광화문에서 「애국학생 궐기대회」를 열게 하여 즉석에서 「의용군」을 편성하기도 했다. 그후 밤마다 각 가정을 뒤져 숨어있는 사람들을 잡아보냈다.
충남의 경우 7월말부터 9월초순까지 강제모집된 젊은이는 여자 약 700명을 합쳐 모두 2만3천여명에 달했다. 처음 2000여명은 훈련을 시켜 의용군으로 양성할 계획으로 북한으로 보내졌으나 8월 초순부터 전세가 급해지고 병력의 손실이 커지자 대전에 집결시켜 2,3일간의 기본 사격연습만을 시킨 후에 바로 낙동강 전선으로 전원 투입했다.  
이 같은 방법으로 강제모집된 젊은이들는 남한에서만 약 20만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북한은 강제징집자들로  旅團을 편성했다. 안동여단, 대전여단, 광주여단등이었다.
이들 청소년들은 많은 수가 전사했으리라 상상할 수 있으며 탈출에 성공한 젊은이들도 상당수에 이른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7)공산당은 부역동원을 했다.
「인민군 구호사업 연락소」라는 것을 설치했다. 남한주민들에 대한 착취와 부역동원은 이 연락소가 맡아서 했다. 수많은 주민들이 포탄을 비롯한 전쟁물자 수송은 물론이고 도로, 교통 및 운반수단은 인민군이 요구할 때는 무조건 제공하도록 되어 있었다. 
 
8)공산당은「빨치산」을 조직하여 제2전선의 군사적 역할을 담당하게 하였
 다. 전남북, 경남북등지에서 주민들을 강제동원하여 지리산을 비롯한 과거의 「유격대」에 입산시켜 「빨치산」을 조직하여 제2전선의 군사적 역할을 담당하게 하였다.

9)「교화소」에 학생들을 가두었다. 그리고
  
인민군 입대를 기피한「사상이 미덥지 못한」학생들을 체포하여 「교화소」
                     
에 집어넣었다가 패퇴하는 과정에서 모두 학살하였다. 안주 평양 신의주의 교
                                 
화소에서는 불을 질러 이들을 죽였고 함흥에서는 1300명이나 되는 정치범을 
          
모두 우물에 넣어 살해했다.
     

9)기타

이밖에도 공산군과 그 추종자들은 곳곳에서 그들을 추종하지 않는 양민들을 

죽창으로 찔러 죽이거나 광산굴 속에 집어 넣어 「다이나마이트」를 터뜨려

서 죽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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